한국에서 개발된 MSX-3 (상)
MSX 시리즈의 제작 판매는 1992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중단되었다. 세계 표준을 제창한 MS에 의해 개발되었으나 일찌감치 MS로부터 버림 받고 아스키와 일본의 가전 5사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어간 비운의 퍼스컴.
한국에서도 삼성, 대우, 금성 등의 가전 3사가 손을 댔고 누계 70만대의 실적이 말해주듯이 그 시절의 유년기를 지낸 사람들이라면 가슴속에 살아 있는 전설 속의 가정용 컴퓨터.
공식적으로 MSX의 마지막 기종은 파나소닉의 MSX Turbo-R (1990년 발매)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MSX-3의 규격이 개발되고 시제품이 완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번 회와 다음 회에 걸쳐 그 시절에 겪었던 MSX-3에 관한 에피소드를 공개하고자 한다.
그 시절 나는 대우전자의 MSX 최고급 기종인 X-2 CPC-400을 가지고 있었다. CPC-400은 기본적으로 MSX-2 규격이지만 특이하게 키보드 일체형이 아닌, 분리 형태를 택하고 있었고 옵션만 추가하면 디지타이즈 등의 비디오 편집 기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정부의 교육용 컴퓨터 16비트 채택 기조가 확정 된 이후 국내에서 MSX는 계속 설 자리를 잃어가는 상황이었다. 불법복제로나마 공급되던 소프트웨어도 쉽게 구할 수 없게 되어 버렸고 컴퓨터 대리점 들은 8비트 컴퓨터를 모두 치우고 발 빠르게 XT/AT급 이상의 16비트 머신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국민학교만이라도 채택되었다면 MSX는 한국에서 좀 더 긴 시간 동안 유저들과 같이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교육용 대상에서 밀려나 버렸기 때문에 학부모가 보기에도 이제는 컴퓨터가 아닌 게임기로 밖에 인식 되지 않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었다.
공부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게임기라면 집에 둘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이 당시 학부모들의 일관적인 생각이었고 각 가정에서 MSX는 빠르게 사라져 갔다.
MSX 관련 잡지사들의 행보도 빨라져서 당시 한국 최대 발매 부수를 자랑하던 컴퓨터학습은 반 정도를 할애해서 다루던 MSX 코너를 아예 없애버리고 잡지명도 ‘마이컴’으로 개명하여 재창간에 나선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물론 전국의 MSX 유저들이 이런 처사에 분개했음은 당연한 노릇. 일부 MSX 골수 매니아들을 중심으로 본사에 항의 서신을 보내거나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의견을 알리려 하는 등 많은 복간 운동을 전개했다.
거기에는 나 역시 포함되어 있었는데 급기야는 지방에서 올라온 MSX 유저들과 함께 마이컴 본사를 항의 방문하고 촛불 시위를 계획 하는 등, MSX에 대한 열정……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MSX를 기반으로 나온 수많은 게임들에 대한) 하나만으로 MSX를 다시 부흥시켜보려 했었다.
하지만 중학생 한 명의 생각이 대세를 돌이키는데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더구나 이것은 정치적 문제도 아닌 상업주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였다. 당시 시장경제 구조는 어디까지나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였고 애당초 가전 3사가 MSX를 만들게 된 이유도 MSX의 스펙이 매력적이라기 때문이거나 소프트웨어의 질을 보고? 이런 것들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정부에서 MSX를 교육용으로 지정하고 각 학교에 일정 분량을 납품하기로 했으니까 시장에서의 이윤을 생각하고 만든 것뿐이었다. 하지만 교육용에서 배제 된 이상 이제 제작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MSX 대표 주자 격이었던 대우전자는 MSX의 개발을 완전 중단한다는 짤막한 기사를 내고 (하지만 재믹스의 생산은 1993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전자 부서 내의 가정용 컴퓨터 개발 인력들을 재배치하기 시작했다.
경쟁 기업인 삼성전자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계산 하에 이루어진 조직 재배치에서 대우전자는 컴퓨터 생산에서 거의 손을 떼고 대우통신에 개발 인력 대부분을 이전시켜 16비트 개발에 주력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
그런 와중에 MSX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대우 전자 본사를 방문한 것이 1991년 여름의 일이었다……
지데일리. 라이온로직스 이우진 이사 / june@g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