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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루트

Editor.zuke 2005. 6. 2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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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의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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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오아시스 지대는 세계 건조지역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서쪽은 지중해 연안에서 메소포타미아·인더스강 유역을 거쳐, 북쪽의 동·서 투르키스탄, 더 거슬러가서는 황허강[]의 상·중류 유역에까지 이르고 있다. 오아시스는 사막이나 반사막() 중의 한 ‘점()’에 불과하였으나 그 곳에서는 주민들의 노력에 의해 농경이 시작되었다. 강물을 끌어오고, 지하수를 퍼올리고, 물을 보호하는 데는 전체 주민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각각 개성·특징을 지닌 민족이나 문화 및 도시국가가 성립하였다.

오늘날 세계의 4대문명 지역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은 모두 오아시스가 있었던 지역이었다고 인정된다. 오아시스가 사막에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큰 의미를 가지는데, 이들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오아시스 루트는 역사시대 이전부터 동서교섭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아시스 루트는 유목루트, 해양루트와 아울러 세계사에서 3대 동서교섭로의 하나였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일찍이 열린 루트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선사시대를 장식한 채색토기()와 같은 계통의 것이 황허강 상류에서 출토되는 것은, 그것이 오아시스에서 오아시스를 거쳐 전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인도에서 발전한 원시불교대승불교가 서역(西)으로 전해지고, 그 동쪽에 이웃한 중국에 들어와서 크게 번성했으며, 다시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또 이란의 여러 종교, 서방의 그리스도교의 한 파가 서역에서 성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전해진 것은 고대에 동서교섭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중국 특산의 비단이 세계를 지배했던 지중해의 로마제국에 들어가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전해진 물건을 대표함으로써 실크로드(비단길)라는 이름이 이 루트에 부여되었다. 중국인은 한대() 이후 7세기 동안에 걸쳐 동()투르키스탄을 가리켜 ‘36국()’이라 하였다. 그것은 인도()의 무한수()인 6을 다시 6배한 것으로 다수의 오아시스 국가를 뜻하는 것이었다. 오아시스에서는 농경이 영위되었으나 경지면적을 늘릴 수는 없었다. 점으로서의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잇는 교통로를 대상이 왕래하였는데, 그 대상로는 문화를 운반하고 정치력()도 운반하였다.

강력한 오아시스 국가가 약소한 오아시스 국가를 지배하고, 중국이 그들 오아시스 국가나 시장()·대상로를 제압하려고 군사력을 행사하였다. 그리하여 오아시스를 잇는 선()이 여럿 생기게 되고, 오아시스 국가의 성쇠()도 선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다. 중세에는 오아시스 루트를 통하여 중국에서 발달한 제지법(), 인도에서 생겨난 제당법() 등이 아라비아 세계에 전해져서, 다시 유럽에 보급되었다. 안녹산(祿)의 난 이후 당()과 서역과의 직접교섭이 끊어지고 서역 동부에서는 위구르인()이 옛 문화를 계승했으나 서부에는 이슬람 세력이 진출하였다. 그 결과 점과 선으로 연결되었던 아시아의 오아시스지대는 동서로 2분되었다.

근세 이후 해상교통이 발달하자 동서교섭의 중심 루트는 해양으로 옮겨지고, 기술의 발달에 따라 교통의 방법도 달라져서 대상에 의한 중계무역은 쇠퇴하였다. 그러나 지역적으로는 아직도 대상이 잔존하고 있다.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음으로 해서 그것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생겨 오늘날 세계사의 성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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